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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와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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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 호승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2005.10.08

​​

 (교육학제 행사를 위한 학생들의 부탁에 의해 기고한 글임.)

길지 않은 내 삶을 되돌아보면, 내가 교육학이라는 학문을 만나고 또한 이 학문의 연구를 삶의 지표를 삼아 나아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숙명적인 선택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사람을 교육시킨다는 동서고금의 가장 숭고한 일을 평생을 두고 연구할 학문으로 선택한 데에는 나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육학자 부친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 보았다. 자녀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적어도 나는 부친께서 선택하여 평생을 연구한 학문을 나 역시 선택하여 그 연구를 삶의 방향으로 삼았고,

  또한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귀한 교수직을 택하여 치열하게 생활하였던 부친과 같은 길을 지금 가고 있으니, 내 삶의 많은 영역은 아버지와 교집합을 형성하는 부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공간을 빌어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아온, 그리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나의 아버지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고자 한다.

저자도 책제목도 알 수 없는 두꺼운 책들이 책장을 가득 메운 집에서 듀이의 교육철학을 열망하여 미국 유학을 꿈꾸는 아버지 밑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불혹의 나이에 미국 유학을 결심하셨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낯선 땅에서 유학생 가장을 둔 가족이 되었다. 그 시절, 어머니께서 언제나 내 머리를 깎아 주시곤 하셨는데, 한국에서 미용 기술과는 거리가 멀게 생활하셨던 어머니셨기에 머리는 언제나 내 맘에 들지 않아 학교에 가기 싫다고 떼쓰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1970년대 초반, 풍족하지 않은 조국을 떠난 유학생으로, 아버지는 접시 닦기 등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학업을 지속하셨고, 어머니 역시 남의 집 아이 돌보는 일과 병원에서 세탁 일을 하시며 가난한 유학생 살림을 꾸려가셨다.

그렇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가운데에서 어렵게 학위 과정을 마치고 아버지는 모 국립대학교 교육학과에서 정년을 마칠 때까지 근무하셨다. 사실 아버지께서 종종 말씀하시길, 당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1960년대는 이미 그 정도의 학력만으로도 대학 강단에서 교수가 될 수 있는 자격 요건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당신이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알게 된 수많은 교육철학자들의 학문의 본고장인 미국에서의 학업을 늘 갈망했었다고 하신다. 남들이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자격요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학문적 열의에 충실하여 물질적 육체적 고통은 달게 감내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학문적 열의와 수고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사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 1980년 봄에 있게 된다. 1980년 봄, 한국사는 처절했다. ‘화려한 외출’이라는 작전명은 ‘잔인한 외출’이 되어 광주시민을 학살하였다. 군사 정권의 절정인 전두환 정권의 출범을 앞두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동료 교수들과 당시의 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돌려 읽었다는 죄로 아버지께서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해직당하게 된다. 한 가장의 실직은 한창 뒷바라지가 필요한 중고교 자녀들이 올망졸망 자라고 또한 칠순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가정에 너무나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게 80년대 초반의 비도덕적인 정부 출현이 양산한 부조리한 사회 분위기는 우리 집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아버지는 해직 일년이 넘어서야 친구의 소개로 계약직 직장을 구하셨다. 나는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의 배려로 근로장학생이 되어 공납금을 면제받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교무실 난로의 연탄을 갈고, 선생님들의 책상을 닦고 정리를 돕는 것이 나의 아침 일과였다. 그러나 나는, 강직하지만 낙천적인 부친의 영향 덕분이었는지, 혹은 어린 나이에 겪은 집안일이어서 인지, 내가 이 사회에 대하여 강한 저항정신이나 부조리함에 대한 심각한 반항심은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지 학생의 신분인 만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생활해야겠다는 소박한 다짐 등으로 하루하루 비교적 즐겁게 생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행히 1984년 봄, 아버지께서는 5년 여 동안의 해직 후, 복직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 2월 정년퇴직을 하며, 교수로서의 삶을 회고하는 수상록 ‘자유가 그리웠습니다’를 출간하게 되는데, 그 수상집에서 내가 중고교 시절에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제자 사랑을 발견하고 콧등이 시큰해진 일이 있었다. 그 중의 한 사건이, 아버지께서 해직되어 집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한 생활을 할 때 - 당시 우리 집 밖에는 보안사 요원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 두어 명이 교대로 늘 골목 어귀를 오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 시국사건으로 도피 중인 제자 한 명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찾아와 은닉을 당부하였다. 어머니와 할머니께서는 아버지의 해직만으로도 고통스러운 당시에 도피 중인 제자가 찾아와 은닉을 당부할 때 펄쩍 뛰었다고 하신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 다락방에 그 제자를 숨겨 두고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는 외부적 불안을 느끼고 그 제자를 떠나보내야 했다. 어느 새벽, 도피 중인 제자를 떠나보내며 아버지는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고 하신다. 그 제자 역시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말할 수 없이 많은 눈물을 쏟아내며 새벽길을 나섰다고 수상록에서 회고하고 있다.

내 기억 어디에도 자리 잡고 있지 않은 이 사건을 나는 수상록을 읽은 나중에 아버지께 여쭈어보았다. 그 당시에 우리 집에 낯선 대학생이 와서 일주일을 넘게 숨어 지내고 있는 것을 정작 그 집 식구인 나와 형은 어떻게 전혀 알지 못했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혹시라도 우리가 학교를 오가는 길에 우리 집에 낯선 대학생 형이 와 있다고 말할까하는 우려에서 자녀들이 등교한 이후에 다락으로 음식을 배달하고 요강으로 그 대학생의 생리현상을 해결하며 어머니께서 그 처리를 하셨다는 것이다. 골목 어귀 대문 밖에는 늘 감시의 눈이 있는 것 같아 낮에도 커튼을 쳐놓고 생활하며 대학생의 흔적을 밤낮없이 감춘 것이었다. 서슬 퍼런 시절, 도피중인 제자를 은닉해주고, 새벽에 숨어 떠나는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시는 아버지를, 내가 정작 교수가 된 이후 자주 그려본 적이 있다. 과연 나도 그렇게 두렵고 공포스러운 시대에 제자를 감추어주고 떠나는 길에 함께 목 놓아 울 수 있을지 내게 종종 자문하곤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육학을 택하였고,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수의 길을 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어찌 보면 외형적인 닮은꼴일 수도 있다. 최근 인기리에 방송되던 ‘불멸의 이순신’ 대신에 ‘제5공화국’을 열심히 시청한 것도 이 연장선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스스로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과연 나도 아버지처럼 부도덕하고 부조리한 현상에 과감히 맞설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는 굳이 내게 교육학을 선택하라고 강요하신 적도 직접적으로 권하신 적도 없다. 그러나 곁에서 늘 지켜보며 자라온 내 성장기를 되돌아보면, 아버지의 강직함과 타협을 거부하시는 성격 등은 내가 아버지의 뒤를 따르리라는 결정을 아무런 주저함 없이 하게 만들었다.

사실 사람을 교육시키는 학문을 연구하고 또 학생을 가르치는 일 만큼 숭고한 일이 또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일을 2대에 걸쳐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부자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교육학을 하는 부자로서, 우리 학생들 가운데 혹 부친이 교육학과 거리가 먼 학생들은 본인을 가족사에 있어서 교육학 1세대로, 향후 2세에게 교육학이라는 숭고한 학문을 전함이 어떨까.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물질적 풍요를 물려주시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에게 가장 고귀한 학문을 가까이서 만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강직함과 올곧음으로 진정한 제자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주신 분이라는 생각에 콧등이 시큰해질 때가 자주 있다. 독재정권 하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던 아버지께서 이제는 손녀의 빠진 이를 보며 껄껄 웃으시는 늙은 할아버지가 되신 모습이 이 가을 나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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